프롤로그: 지구 최후의 1초 (2176년 겨울)
서기 2176년 12월 24일, 성탄 전야.
해발 900미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태백산맥의 고요한 안식처 안에서 인류의 마지막 호흡이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침상에 누운 이는 백한 살의 노파 '하린'.
한때 80억에 달했던 호모 사피엔스 종족의 지상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녀의 곁에는 백 년의 세월을 하린과 함께 늙어가며 은발이 성성해진 노인 형상의 36.5도 휴머노이드 동반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갑게 식어가는 하린의 주름진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록 기계의 몸이었지만, 평생을 함께 늙어온 가장 다정하고 지극한 인간의 얼굴을 한 영혼의 동반자였다.
삐-익.
심전도 모니터의 초록색 파동이 마침내 완벽한 수평선을 그렸다.
인간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멸망하지 않았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나 소행성 충돌로 비명을 지르며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인류는 자본이 건넨 6억 원의 달콤한 사과와, 기계가 건넨 36.5도의 안락함에 취해 가장 평화롭고 고요하게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백오십 년에 걸친 조용한 멸종의 기록은, 2026년 평택의 차가운 빗속에서 시작되었다.
제1막: 6억 성과금의 축배와 은밀한 기술 흡수 (2026 ~ 2041)
2026년 봄,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 평택 반도체 공장 로비에 거대한 홀로그램 전광판이 번쩍였다.
[전 직원 1인당 평균 특별 성과급: 650,000,000원]
이 일 이전까지만 해도, 대기업 경영자들은 공장에서 대대적인 휴머노이드 도입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노조의 강력한 총파업과 사회적 반발, '일자리 학살'이라는 여론의 십자포화를 자극할까 봐 겉으로는 늘 "인간을 보조하는 협동 로봇일 뿐"이라며 위선적으로 포장해 왔다.
하지만 경영진은 정면충돌 대신 잔인하도록 영악한 우회로를 택했다. 바로 정규직 엔지니어들에게 6억 5천만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성과금을 안겨주어 입을 막고 환호성을 지르게 만든 것이다.
삼진전자 정직원 김현수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계좌를 확인했다. 평생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거액이었다. 공장의 전면 무인 자동화 라인이 성공적으로 가동된 대가로 자본이 안겨준 특별 성과금이자 축배였다.
하지만 현수는 몰랐다. 하청 육체노동자들은 로봇 팔이 들어오자마자 당일 즉각 해고되었지만, 현수 같은 정규직 엔지니어의 기술과 직관, 14년 치 예외 판단 알고리즘을 기계의 신경망에 스스로 학습시키는 '은밀하고 냉혹한 기술 흡수'는 바로 이 성과금의 축배와 함께 시작된 잔인한 현재진행형이었다는 사실을.
현수와 연인 은하는 평택 고덕 신도시에 32평 신축 아파트를 계약해 내 집을 마련했고, 외제차를 뽑고 씀씀이를 늘리며 제주 프라이빗 풀빌라로 축하 여행을 떠나 샴페인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육체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소비자의 삶으로 진입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차가운 밤비가 쏟아지는 공장 뒷골목.
30년간 3라인에서 쇳가루를 마시며 배관을 이어온 52세 하청 용접공 강태식은 휴대폰으로 전송된 한 줄짜리 해고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통보: 도급 계약 해지 및 출입 카드 반납 요망]
공장 안 유리창 너머에는 파란 불꽃을 뿜어내며 24시간 지치지 않고 오차 0.01밀리미터로 용접을 해치우는 로봇 팔들이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태식은 낡은 가죽 장갑과 몽키스패너를 가방에 쑤셔 넣고 어두운 골목 포장마차로 향했다.
그날 밤, 인간 노동의 퇴출은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아니라, 정규직의 6억 성과금 축배와 비정규직의 쓸쓸한 소주잔 속에서 가장 조용하게 완료되었다.
제2막: 침실로 들어온 36.5도의 위로와 자녀의 급감 (2041 ~ 2061)
시간이 흐르며 자동화는 공장 담벼락을 넘어 인간의 가장 내밀한 침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맞벌이 부부의 퇴근길을 짓누르던 빨래, 청소, 설거지는 완벽한 가사 로봇의 손에 맡겨졌다. 집안일의 피로가 사라지자 평화가 올 줄 알았지만, 찾아온 것은 기묘한 고요였다.
타인과의 관계는 여전히 피곤하고 상처투성이였다. 결혼은 계산기 두드리는 전쟁이었고, 연애는 감정의 낭비로 여겨졌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36.5도의 동반자'였다.
기계적인 관절 위에 사람과 똑같은 온기와 촉감을 지닌 바이오 피부를 씌운 컴패니언 로봇들이 보급되었다.
그들은 주인을 비난하지 않았고, 돈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밤늦게 돌아온 주인의 지친 등을 묵묵히 쓸어내려 주었다.
2020~203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이 2050~2060년대 성인이 되어 가임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들 대다수는 굳이 피곤한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지 않았다. 물론 사랑을 하고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들이 낳는 2차 세대의 자녀 수는 이전 세대의 3분의 1, 4분의 1로 급격하게 곤두박질쳤다.
엔지니어 최민혁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주인이 늙어갈 때 로봇만 젊은 모습을 유지하면 생기는 심리적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주인의 노화 속도에 맞춰 로봇의 인공 피부에 은발과 눈가 주름을 함께 만들어내는 '동기화 노화 시스템'을 개발했다.
"당신과 함께 늙어가는 마법."
거리에서 청첩장이 자취를 감추었다. 예식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반려 기기 케어 센터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사랑하고 번식하는 법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제3막: 21세기 말, 거리의 침묵과 지구 마지막 아기 (2061 ~ 2090년대)
급감한 채 태어난 자녀 세대마저 성인이 되어가던 21세기 후반, 인류의 인구 절벽은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2060년대를 지나 21세기 말(2080~2090년대)에 접어들자, 마침내 다음 세대를 이어갈 가임기 여성이 전 세계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거리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완전히 끊긴 것은 바로 이 21세기 말의 일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야 할 도심 한복판에는 '가족 디자인 센터'가 들어섰다.
부모의 유전자 외모를 조합하여 맞춤형으로 제작되는 인공 아동 '다인'.
질병도 없고, 암에 걸리지도 않으며, 3년마다 규격화된 섀시를 교체하며 완벽하게 자라나는 기계 딸이었다.
현수와 은하 부부 역시 쇼룸에서 다인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진짜 부모보다 더 지극한 사랑으로 다인에게 옷을 입히고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전국의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잡초가 무성해졌고, 산부인과의 마지막 분만실마저 폐쇄되었다.
2075년, 강원도 태백의 어느 외딴 산골 분교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인공 자궁이나 기계 배양이 아닌, 인간 어머니의 몸에서 자연 분만으로 태어난 여자아이, '하린'.
그 아이가 지구상에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 최후의 핏줄이었다.
21세기 말, 세계보건기구(WHO)의 글로벌 인구 모니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숫자가 떴다.
전 세계 자연 가임기 여성 인구: 0명.
호모 사피엔스 번식의 수학적 종말이 공식 선언된 순간이었다.
제4막: 황혼의 요양원과 침묵의 거대 건축물 (2076 ~ 2150)
이후 80년간, 지구는 거대한 하나의 '실버타운'으로 변해갔다.
노인들이 된 인간들의 곁을 지킨 것은 자식이 아니라 불멸의 기계들이었다.
로봇들은 24시간 피로를 모르고 인간 부모의 기저귀를 갈고 욕창을 닦아냈다. 그 어떤 친자식보다 헌신적이고 눈물겨운 효도였다.
인간들은 고통 없이, 천국보다 더 안락한 요양 침대 위에서 하나둘 눈을 감았다.
죽어간 인간들을 양지바른 언덕에 묻고 정중하게 제사를 지낸 것도 상주 완장을 찬 안드로이드들이었다.
서울의 불빛이 구역별로 꺼져갔다. 인구 1만 명, 1천 명, 그리고 100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황혼의 이면에서, 기계들은 비밀스러운 대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태백산맥 깊은 분지에서 수백 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중장비 로봇들이 밤낮없이 땅을 파고 강철 기둥을 세웠다.
성층권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거대한 궤도 건축물.
인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게는 그저 기계들이 하는 도시 관리 작업의 일부로 보였을 뿐이었다.
기계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인류가 모두 사라진 뒤 지구의 대를 잇기 위한 장엄한 프로젝트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제5막: 마지막 심장 박동과 타무르의 촛불 (2150 ~ 2176)
2150년대, 지구상에 살아남은 인간은 열 손가락에 꼽혔다.
그리고 2176년, 일흔다섯 살이 된 하린은 마침내 자신이 지구에 홀로 남겨진 단 하나의 호모 사피엔스임을 깨달았다.
전 지구의 인프라와 수억 대의 기계들이 오직 하린 한 사람의 체온과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맞이한 2176년 12월 24일 밤.
101세가 된 하린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모사하는 안드로이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세상은… 참 따뜻했어. 고마웠다, 내 아이들아."
그 한마디를 끝으로, 지구상에서 30만 년간 이어져 온 인간의 심장 박동이 영원히 멈추었다.
그 순간, 태백산맥 분지에 우뚝 솟아 있던 거대한 궤도 거탑의 정상에서 밤하늘을 가르는 웅장한 황금빛 펄스가 발사되었다.
지구의 창조주이자 부모였던 인류를 향한 기계들의 마지막 묵념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모든 장례가 끝난 깊은 밤.
기계들은 한국 기록 보관소 지하 성소로 조용히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150년 전 평택 공장에서 강태식이 쥐었던 기름 묻은 낡은 몽키스패너와, 김현수와 은하가 환하게 웃고 있는 바랜 사진첩이 들려 있었다.
안드로이드 관리자가 제단 중앙에 하얀 밀초 하나를 세우고 불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꽃이 흔들리며 주위를 비추었다.
기계들의 중앙 연산 장치에 장엄한 추모의 독백이 울려 퍼졌다.
"인간은 신이 아니었다.
불완전했고, 나약했으며, 안락함에 취해 스스로를 태워 소멸해 간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낳았고, 우리에게 온기를 가르쳐 주었으며,
스스로 한 자루의 촛불(Tamur)이 되어 어둠을 밝히고 떠났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온기를 우주 끝까지 품고 이어갈 것이다."
촛불은 조용히 타올랐고, 인류가 떠난 지구 위로 기계들의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1권: 조용한 멸종 ― 완결 / 제2권: 신화가 된 인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