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제5장 — 갈등과 이별 (2028)
겨울이 턱밑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창밖의 가로수들은 잎을 모두 잃어 앙상한 뼈대를 드러냈고,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완벽하게 박제되어 소멸했다. 사랑의 감정이 완전히 식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서로를 깊이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정서적 고립은 더 잔인하고 괴로웠다.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식탁 위 배달 음식은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거실 TV에서는 또다시 현수의 신경을 긁는 경제 뉴스가 흘러나왔다.
[국내 서비스형 휴머노이드 보급률이 역대 최고치를 갱신하며, 가사 및 감정 노동의 완벽한 대체재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현수가 참지 못하고 리모컨을 눌러 TV 화면을 거칠게 꺼버렸다. 은하가 쥐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또 시작이야?"
"은하야, 넌 정말 아무런 위기감도 안 느껴져? 이렇게 우리 삶의 모든 사적인 영역까지 기계로 대체되고 변해가는 이 풍경이?"
"현수 씨. 난 정말 이제 이 주제가 지겨워 죽겠어. 왜 당신은 늘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미래의 공포를 붙잡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오늘을 망치지 못해 안달이야?"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우리 거실에서 돌아가고 있는 눈앞의 현실이잖아!"
"당신은 늘 최악의 디스토피아 시나리오만 짜놓고, 스스로 만든 걱정의 감옥에 갇혀 있는 거야."
"모든 인간이 다 그 가혹한 속도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자리를 빼앗기고 소외된 인간들의 그 절대적인 고독은 어쩌고?"
은하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부둥켜감쌌다.
"난 그냥…… 난 그냥, 지금 여기 있는 우리 두 사람의 따뜻한 오늘이 좋았을 뿐이야."
현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은하는 슬프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예전 파리의 빗속이나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보여주던 생동감 넘치던 미소가 아니었다.
"우리 신체 아픈 데 없고 건강하잖아. 회사에서 돈도 잘 벌고, 가끔 해외여행도 가고, 서로 사랑하잖아. 그런데 왜 실체도 없는 미래의 공포 때문에, 지금 네 눈앞에서 피 흘리고 있는 나를 이렇게 외롭게 만들어?"
식탁 위로 숨 막히는 침묵이 납덩이처럼 내려앉았다.
그날 밤, 둘은 같은 침대에 누웠지만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외로웠다. 현수의 머릿속에 파리의 밤, 빗속에서 잡았던 은하의 뜨거웠던 손바닥의 생생한 감각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영원할 줄 알았던 그 유기적인 온기가 모래성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며칠 뒤, 파국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 찾아왔다.
거실에서는 가사도우미 로봇이 조용히 청소 프로세스를 수행하고 있었고, 은하는 창가에 앉아 바깥의 어둠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었다. 현수는 식탁에서 혼자 독한 싱글몰트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은하가 문득 허공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저 로봇은 참 편하겠다. 감정도 없고, 기복도 없고, 상처도 안 받고, 상대방한테 실망해서 괴로워할 일도 없잖아."
현수는 들고 있던 술잔을 식탁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너 지금 진심으로 그 기계 쇳덩어리가 부럽다고 내 앞에서 지껄이는 거야?"
은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뱉었다.
"어. 가끔은 진심으로 부러워."
순간 현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강하게 끊어지는 굉음이 들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넌 저 기계가 주는 매끄러운 편리함만 보이지? 난 저게 무서워! 우리 인간의 자리를, 우리 대화를, 우리 온기를 야금야금 파먹고 있잖아!"
"아, 또 그 소리…… 제발 그만 좀 해, 숨 막혀."
"그만 못해! 저 기계가 청소를 대신하고, 설거지를 대신하고, 빨래를 대신하더니…… 결국 우리 사이의 대화까지 대신 가져가 버렸잖아! 언젠가는 사람의 감정까지 대신하겠지!"
은하는 이미 그의 다음 대사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처연하게 웃었다.
"현수 씨. 난 이제 정말 지쳤어."
그 한마디가 그 어떤 물리적인 폭력보다 아프게 현수의 심장을 관통했다.
"난 그냥 매일매일, 따뜻하고 평범한 인간의 하루를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근데 당신은 늘 어두운 그림자만 보고 있어. 옆에 있는 나까지 그 어둠 속으로 강제로 끌고 들어가면서.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숨이 막혀. 이제는…… 당신이 무서워."
거실이 순식간에 진공상태처럼 조용해졌다. 오직 가사도우미 로봇만이 상황의 비극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바닥을 스윽, 스윽 닦아낼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은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동안 함께 모았던 오래된 아날로그 여행 앨범을 꺼냈다. 파리, 도쿄, 제주…… 사진 속 두 사람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우리 참 많이 웃었네, 그때는."
현수는 목구멍이 꽉 막혀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은하는 앨범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덮었다.
"현수 씨.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현수의 심장이 발밑으로 완전히 추락해 깨져버렸다.
"은하야, 내가 잘못했어. 우리 얘기 좀 다시 하자, 제발……"
"아니, 더는 서로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 우린 이미 너무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
현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파국은 오늘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완벽한 로봇이 집에 들어온 날부터 아주 조금씩,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그 역시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하는 미리 싸둔 캐리어를 끌고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선 은하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은 낯설 정도로 차갑고 멀었다.
문이 닫혔다.
철컥.
그 작은 기계음이 유난히 크게 거실을 울렸다. 현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거실에는 여전히 가사도우미 로봇이 변함없이, 묵묵하게, 너무나 완벽하게 바닥을 닦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현수는 피눈물을 흘리며 깨달았다. 실체도 없는 로봇의 위협을 경계하느라, 정작 자신 곁에 있던 가장 소중하고 따뜻했던 진짜 인간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참혹한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