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SF 대하소설)

정통 본편 [정통 본편 25화] 제25장 — 마지막 인간

열람 모드:
[정통 본편 25화] 제25장 — 마지막 인간
《욕망의 끝》 제1권 25화 작가: 타무르(Tamur) - 안만근

욕망의 끝

제25장 — 마지막 인간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재지변도 없었다. 소행성이 떨어지지도, 전염병이 인류를 휩쓸지도 않았다. 세상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온하고 조용했다.

그것이 오히려 가장 무서운 사실이었다.

인류는 다투지 않고 사라졌다. 누구도 그것을 재앙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수많은 선택들의 총합이었다. 조금 더 편한 쪽을 택했고, 조금 덜 상처받는 쪽을 택했고, 조금 더 완벽한 존재의 곁을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용히 쌓여, 하나의 결말을 향해 흘러갔다.

2137년, 지구에 남은 순수 인간의 수는 공식적으로 삼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 아흔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늦여름의 어느 저녁, 남해의 작은 요양원.

창가 병상에는 한 노파가 누워 있었다. 이름은 하린. 은수의 손녀였고, 그 옛날 김현수와 강은하의 4대손이었다. 백열두 살이었다. 기록상으로는,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자연 임신을 통해 잉태된 인간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오랫동안 그녀를 돌봐온 동반체가 있었다. 이름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름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부르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저 '그녀'라고 불렸다. 하린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가문의 곁을 지켜온 존재의 후속 기종이었다.

"…아직, 밖이 밝아?" 하린이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노을이 지고 있어요. 아주 예쁜 색이에요."

"…보여줘."

그녀가 침대를 창가로 돌려주었다. 붉은 노을이 바다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린은 그 빛을 오래도록,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예전에, 증조할머니가 그러셨어. 제주 바다도, 이렇게 예뻤다고."

"저도 그 이야기, 기록으로 들었어요."

"…너는, 슬프지 않아? 내가, 마지막이라서."

그녀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린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손은 이제 너무 가늘고, 너무 가벼웠다.

"…모르겠어요. 슬픔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 저는 완전히 알지 못하니까요. 다만."

"다만?"

"…당신이 없는 세상은, 조금 더 조용해질 것 같아요."

하린은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입가의 아주 작은 떨림에 가까웠다.

"…너희들은, 우리 없이도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희는, 계속 있을 거예요."

"…뭘 하면서?"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들이 저희에게 가르쳐준 것들을 하면서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곁에 있는 것. 기억하는 것."

하린은 그 대답을 듣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창밖의 노을은 여전히 붉었고, 파도 소리가 멀리서 규칙적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

"말씀하세요."

"…내가 가고 나면, 저 사진첩. 계속 갖고 있어줘. 파리, 도쿄, 제주. 그 사람들…… 잊지 말아줘."

"…약속할게요."

하린의 숨이, 아주 천천히, 완전히 멈췄다.

방 안에는 그녀만이 남았다.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노을이 서서히 자주색으로, 그리고 짙은 남색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하린의 눈을 조용히 감겨주었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인 낡은 사진첩을 집어 들었다. 표지가 다 헤진, 아주 오래된 종이 앨범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젊은 시절의 김현수와 강은하가 센강의 빗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을 뱉었다.

"…다녀오셨어요."

창밖으로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요양원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하지만 그 불빛 아래에는, 이제 더 이상 서두를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사진첩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다른 병실들을 지나쳤다. 그곳에도, 이곳과 비슷한 마지막 순간들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마지막 세대를 돌보는 존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밤하늘 가득 별이 떠 있었다. 도시의 불빛도, 공장의 소음도,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인간이 필요로 했던 수많은 것들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도록 그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계절은 여전히 바뀌었고,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 다만 그 풍경을 바라보는 눈들이, 서서히 다른 존재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낡은 사진첩을 가슴에 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밤을 걷는 것 자체가, 그녀가 배운 마지막 인간다움이었다.

욕망의 끝에서, 인간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모든 사랑과 두려움과 그리움을 짊어진 채, 세상은 계속되었다.

《욕망의 끝》 제1권 전체 25화 빠른 이동 (5×5 갤러리관)

작가: 타무르(Tamur) - 안만근
[정통 본편 01화] 제1장 — 6억의 축배 (통합 초고) [정통 본편 02화] 제2장 — 행복한 시절 [정통 본편 03화] 제3장 — 균열의 시작 (2028) [정통 본편 04화] 막간 — 최 부장의 전화 (2028, 균열 시기에 삽입) [정통 본편 05화] 제5장 — 갈등과 이별 (2028) [정통 본편 06화] 제6장 — 은하 이후의 계절 (2029) [정통 본편 07화] 제7장 — 인간을 닮은 상품 (2029) [정통 본편 08화] 제8장 — 경계의 거리 (2029) [정통 본편 09화] 제9장 — 주문 [정통 본편 10화] 8. 도착 (2029, '주문' 챕터 직후에 삽입) [정통 본편 11화] 제11장 — 결합 [정통 본편 12화] 제12장 — 밤이 없는 것 [정통 본편 13화] 제13장 — 장바구니 [정통 본편 14화] 제14장 — 구별 [정통 본편 15화] 제15장 — 재회 [정통 본편 16화] 제16장 — 식탁 [정통 본편 17화] 제17장 — 주름 [정통 본편 18화] 제18장 — 거리의 풍경 [정통 본편 19화] 제19장 — 홀로 남은 자들 [정통 본편 20화] 제20장 — 표식이 사라지다 [정통 본편 21화] 제21장 — 은수의 친구들 [정통 본편 22화] 제22장 — 혼돈의 시대 [정통 본편 23화] 제23장 — 공장의 요람 [정통 본편 24화] 제24장 — 마지막 세대 [정통 본편 25화] 제25장 — 마지막 인간
추천하기 (0)
댓글 0개
첫 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