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제6장 — 은하 이후의 계절 (2029)
처음 며칠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는 방어 기제가 작동하여 감각이 마비되어 둔해진다. 현수는 평소처럼 알람 소리에 깨어 출근했고, 평소처럼 무미건조하게 회의를 했으며, 평소처럼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회사 사람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역시 가면을 쓴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치 그렇게 연기하면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다는 듯이.
진짜 지옥은 퇴근 후 문을 열 때 찾아왔다. 집 문을 열면 짐승 같은 정적이 가장 먼저 온몸을 덮쳤다. 그것은 단순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숨결을 가진 존재가 완전히 소멸한 뒤에만 생기는 잔인한 종류의 정적이었다.
예전에는 문을 열면 은하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마중을 나왔다. "왔어?",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배고프지? 빨리 씻어." 별것 아닌, 공기처럼 당연했던 말들. 그런데 그 사소한 소음들이 사라지자 평수가 넓은 집 전체가 거대한 무덤처럼 텅 비어버렸다.
현수는 대답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신발을 벗으며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다녀왔어."
그리고 곧바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후회를 했다. 아무도 없었다. 돌아오는 건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자신의 메마른 메아리뿐이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 몇 캔, 생수,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반찬 통 몇 개. 그게 전부였다. 예전에는 냉장고 문을 열면 늘 시끌벅적한 흔적들이 있었다. 은하가 좋아하던 달콤한 요플레, 깨끗하게 손질된 과일 락앤락, 먹다 남긴 카페 컵. 그 온기 어린 흔적들이 완벽하게 세척되어 사라진 냉장고 내부의 하얀 LED 불빛은 소름 끼치도록 낯설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독한 위스키에 취해 집에 돌아온 현수는 옷장을 열어 정리를 하다 멈칫했다. 옷장 깊은 구석에 은하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두고 간 분홍색 털목도리가 걸려 있었다. 아주 오래전, 파리의 겨울 상점에서 함께 낄낄거리며 샀던 물건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목도리를 코끝에 대자, 심장이 멎을 듯이 아주 희미하게 은하의 샴푸 향과 살 냄새가 배어 나왔다. 그는 밤이 깊도록,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어가도록 그 목도리를 얼굴에 묻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현수의 앞에서 은하의 이름을 지워나갔다. 하지만 당사자는 아니었다. 현수는 여전히 하루에도 수백 번씩 은하를 호흡했다. 길을 걷다가 문득 멈춰 섰고, 커피를 마시다 멍해졌으며, 잠들기 직전에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은 매일 밤 찾아오는 '잠'이었다. 예전에는 침대에 누우면 곁에 은하가 있었다. 그때는 그 모든 게 귀찮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뼈저리게 안다. 그 귀찮았던 모든 소음이 바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침대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은하가 사라진 침대는 이전보다 두 배, 아니 수십 배는 더 넓고 시리게 느껴졌다.
현수는 어느 날 새벽,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속삭였다.
"은하야……"
대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뇌가 다시 인지하는 데 걸리는 그 몇 초의 공백이 너무나 잔인하게 현수를 난도질했다.
봄이 왔다. 세상은 눈치도 없이 화사한 벚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거리는 웃음소리로 넘쳐났고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봄볕 아래 가득했다. 현수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주말, 술기운에 이끌리듯 베란다 창고를 정리하던 현수는 먼지가 쌓인 여행 앨범을 발견했다. 파리, 도쿄, 제주…… 앨범을 펼치는 순간, 억눌러왔던 시간이 댐이 터지듯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제주도 바닷가 사진이었다. 바람에 머리가 엉망이 된 채 자지러지게 웃는 은하, 그리고 그 옆에서 세상에 아무 걱정 없다는 듯 행복하게 웃고 있는 과거의 자기 자신.
현수는 그 사진을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사진 속 은하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은하가 떠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짐승처럼 통곡했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천천히, 어깨를 격렬하게 떨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그날 밤 그는 앨범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침대 바닥에서 잠들었다. 마치 그것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은하의 마지막 온기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은 현수의 슬픔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TV에서는 더 고도화된 4세대 휴머노이드 로봇이 출시되었다고 광고했고, 거리에는 점원 없는 무인 매장이 일상이 되었으며, AI 서비스는 공기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현수는 문득 깨달았다. 세상 모든 것이 기술을 타고 앞으로 가고 있고 은하마저 저 앞으로 걸어갔는데, 오직 자신만이 과거의 어느 날에 박제되어 있다는 것을. 은하가 떠나며 문이 철컥 하고 닫히던 2028년의 그 거실 현관문 앞에, 자신은 여전히 처참하게 멈춰 서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